오비키 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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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비키 게이지는 일본의 야구 선수로, 오릭스 버펄로스,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유격수로서 뛰어난 수비 능력을 보여 '수비 장인'으로 불렸으며, 대학 시절에는 주장을 맡아 '호세이 대학 사상 최고의 주장'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2007년 오릭스에서 프로 데뷔 후 2019년 은퇴할 때까지 1군에서 활약하며, 통산 991경기 출장, 타율 0.251, 32홈런, 272타점을 기록했다. 2015년에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유격수로서 팀의 우승에 기여했으며, 2019년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서 활동하며, 2025년부터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코치로 활동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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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키 게이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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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2015년 3월 5일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 |
선수명 | 오비키 게이지 |
로마자 표기 | Keiji Obiki |
가나 | おおびき けいじ |
한자 | 大引 啓次 |
출생일 | 1984년 6월 29일 () |
출생지 | 오사카부 오사카시 스미요시구 |
신장 | 178 |
체중 | 84 |
포지션 | 유격수, 3루수 |
투구 | 우 |
타석 | 우 |
선수 경력 | |
고등학교 | 나니와 고등학교 |
대학교 | 호세이 대학 |
프로 입단 연도 | 2006년 |
드래프트 순위 | 대학생・사회인 드래프트 3순위 |
첫 출장 | 2007년 3월 24일 |
마지막 경기 | 2019년 9월 3일 |
프로 구단 경력 (선수) | |
2007-2012 | 오릭스 버펄로스 |
2013-2014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
2015-2019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
코치 경력 | |
2025-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
선수 정보 | |
소속 구단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
역할 | 내야 수비・주루 코치 |
등번호 | 80 |
연봉 (2016년) | 7,000만 엔 ※2015년부터 3년 계약 |
NPB 성적 | |
데뷔 리그 | NPB |
데뷔 년도 | 2007년 |
데뷔 팀 | 오릭스 버펄로스 |
최종 년도 | 2019년 |
최종 팀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
타율 | .251 |
홈런 | 48 |
타점 | 356 |
안타 | 1,004 |
별칭 |
2. 프로 입단 전
오사카부 오사카시 스미요시구 출신으로, 초등학교 1학년 때 연식 야구를 시작하며 야구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오사카 시립 아비코 중학교를 거쳐 나니와 고등학교에 진학, 1학년 가을부터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며 2학년 봄에는 제73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 8강 진출에 기여했다.
고교 졸업 후 호세이 대학에 진학하여 1학년 봄부터 주전 3루수 자리를 확보했고, 4학년 때는 주장을 맡아 팀의 도쿄 6대학 야구 리그 2연패를 이끌었다.[41] 대학 리그 통산 121안타를 기록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바탕으로 2006년 대학·사회인 드래프트 회의에서 오릭스 버펄로스로부터 3순위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단했다.
2. 1. 유소년 시절
오사카부 오사카시 스미요시구 출신으로, 2000년 역사의 가미스무치 신사 궁사(宮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집안의 연례 행사나 섣달그믐에는 신사 일을 도왔다.[40][2]오사카 시립 나가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스미요시 연맹 소속팀 '오사카 골든 파이어'에서 연식 야구를 시작해 투수 겸 유격수를 맡았다. 오사카 시립 아비코 중학교 시절에는 경식 야구팀 '스미요시 야마토가와 시니어'에 소속되어 유격수로서 전국 대회에 출전했다.
나니와 고등학교에서는 1학년 여름부터 벤치에 포함되었고, 1학년 가을부터 주전 유격수 자리를 확보했다. 2학년 봄에는 제73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하여 팀의 8강 진출에 기여했다. 3학년 여름 오사카 대회에서는 5개의 홈런을 치는 등 고교 통산 15홈런을 기록했다.
고교 졸업 후 호세이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1학년 봄 도쿄 6대학 야구 춘계 리그 개막전부터 9번 타자 겸 3루수로 출전하며 주전 자리를 꿰찼다. 3학년 가을 리그에서는 모교의 5년 만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4학년 때는 주장으로 선임되어 춘계 리그에서 2시즌 연속 우승을 이끌었다. 주장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하여 '호세이 대학 사상 최고의 주장', '학생 야구의 귀감'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41] 대학 리그에서는 수위 타자 2회, 최다 타점 1회, 최다 도루 1회를 기록했고, 베스트 나인에는 다섯 차례 선정되었다. 또한 고바야카와 다케히코가 보유했던 팀 최다 안타 기록(114개)을 경신하며 통산 121안타를 기록,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다카하시 요시노부를 넘어 리그 역대 단독 4위에 올랐다. 리그 통산 성적은 98경기에 출전하여 365타수 121안타, 타율 0.331, 5홈런, 62타점이다.
대학 4학년이던 2006년 11월 4일, 메이지 진구 외원 창건 80주년을 기념하여 메이지 신궁 야구장에서 열린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도쿄 6대학 선발팀 간의 경기에서는 1번 타자로 선발 출전하여 선두 타자 홈런을 포함해 3안타를 기록했다. 같은 해 11월 21일 열린 대학·사회인 드래프트 회의에서 연고지 팀인 오릭스 버펄로스로부터 3순위 지명을 받았다. 추정 연봉 1200만엔의 조건으로 입단했으며 등번호는 '''10'''번이 되었다.
2. 2. 고교 시절
나니와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학년 여름부터 벤치에 들어갔고, 1학년 가을부터는 주전 유격수 자리를 차지했다. 2학년 봄에는 제73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하여 팀의 8강 진출에 기여했다. 3학년 여름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오사카 대회에서는 비록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5개의 홈런을 쳤으며, 고교 통산 15개의 홈런을 기록했다.2. 3. 대학 시절
고교 졸업 후 호세이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1학년 때 도쿄 6대학 야구 춘계 리그 개막전에서 9번 타자 겸 3루수로 데뷔한 이래 부동의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 3학년 추계 리그에서는 호세이 대학의 5년 만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4학년 때는 주장으로 발탁되어 춘계 리그에서 2시즌 연속 우승을 이끌었다. 주장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하여 ‘호세이 대학 사상 최고의 주장’, ‘학생 야구의 귀감’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다른 대학으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41]대학 시절 동안 수위 타자 타이틀을 두 차례, 최다 타점과 최다 도루 타이틀을 각각 한 차례씩 획득했으며, 베스트 나인에는 다섯 차례 선정되었다. 또한, 고바야카와 다케히코가 보유하고 있던 호세이 대학 역대 최다 안타 기록(114개)을 경신했고,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다카하시 요시노부를 넘어 리그 역대 단독 4위에 해당하는 통산 121안타를 기록했다. 도쿄 6대학 리그 통산 성적은 98경기에 출전하여 365타수 121안타, 타율 0.331, 5홈런, 62타점이다.
대학 4학년이던 2006년 11월 4일, 메이지 신궁 야구장에서 열린 메이지 신궁 외원 창건 80주년 기념 경기(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대 도쿄 6대학 선발팀)에 1번 타자로 선발 출전하여 선두 타자 홈런을 포함한 3안타를 기록했다. 같은 해 11월 21일에 열린 대학·사회인 드래프트 회의에서 지역 구단인 오릭스 버펄로스로부터 3순위 지명을 받았다. 추정 연봉 1200만엔의 조건으로 입단했으며, 등번호는 '''10'''번을 받았다.
3. 프로 선수 시절
대학 4학년 때인 2006년 11월 4일 메이지 신궁 야구장에서 열린 메이지 신궁 외원 창건 80주년 기념 경기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대 도쿄 6대학 선발전에 도쿄 6대학 선발의 1번 타자로 기용되어 선두 타자 홈런을 포함한 3안타를 기록했다. 경기 후 같은 달 21일에는 2006년 NPB 대학·사회인 드래프트 회의에서 지역 구단인 오릭스 버팔로즈로부터 3순위로 지명받았다. 추정 연봉 1200만엔의 조건으로 입단했다. 등번호는 '''10'''이다.
3. 1. 오릭스 버펄로스 시절 (2007-2012)
2007년 3월 24일 개막전에 8번 타자 겸 유격수로 선발 출장했다. 오릭스에서 신인이 개막전에 선발 출전한 것은 지명타자로 출장한 2002년 고토 미쓰타카 이후였고, 유격수로서는 1992년 다구치 소 이후 처음이었다. 프로 첫 타석에서 사이토 가즈미를 상대로 첫 안타를 기록하고 출루했고, 직후에 첫 도루도 성공했다. 7월 6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전에서 나가이 레이를 상대로 프로 첫 홈런을 쳤다.[3] 시즌 내내 주전 유격수 자리를 거의 차지했지만, 시즌 후반에는 컨디션 난조로 인해 상태가 좋았던 고토에게 선발 자리를 내주는 경우도 많았다. 규정 타석에는 2타석 부족했지만, 최종적으로 출루율 .329를 기록하는 등 신인 야수로서는 좋은 성적을 남겼다. 리그 최악 3위이자 유격수로는 퍼시픽 리그 2위인 17개의 실책을 기록했지만, 레인지팩터에서는 리그 유격수 중 1위였다. 한편, 타율 .274에 비해 득점권 타율 .212로 찬스 상황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과제도 남겼다. 시즌 후 추계 캠프에서 임시 코치를 맡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스트렝스 컨디셔닝 코치 덕 재로우가 고안한 '공 줍기 테스트'에서 팀 내 최고 기록을 세웠다.2008년 3월 18일, 한신 타이거스 선수 등이 주로 소속된 오피스 S.I.C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었다. 개막전에는 8번 타자 겸 유격수로 출장했다. 개막 직후에는 극심한 타격 부진에 시달렸지만 서서히 회복했다. 5월 7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는 연장 10회말에 오기노 다다히로를 상대로 프로 데뷔 첫 끝내기 안타를 쳤다. 그러나 6월 9일 한신과의 경기에서 상대 투수 구보타 도모유키에게 오른손 집게손가락에 몸에 맞는 볼을 맞고 골절되어 전력에서 이탈했다. 8월 27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에서 복귀했고, 이후 다시 주전 유격수로 출전했다. 최종적으로는 부상의 영향으로 88경기 출전에 그쳐 타율 .258을 기록했지만, 득점권 타율 .319를 기록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2009년에는 팀에 부상자가 속출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107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78을 기록하며 주전 유격수 자리를 거의 확보했다. 그러나 9월 1일 소프트뱅크전에서 갓토 게이스케에게 왼손목에 사구를 맞고 골절되어 남은 시즌을 뛰지 못했고, 또다시 규정 타석에 도달하지 못했다. 8월 25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전에서는 9회말 2사에서 동점 적시타를, 연장 10회말에는 끝내기 안타를 치기도 했지만, 시즌 득점권 타율은 .221에 그쳤고 개인 최다인 84개의 삼진을 당했다. 또한, 타격감이 좋을 때는 안타를 몰아치지만 부진에 빠지면 좀처럼 안타를 생산하지 못하는 기복 심한 모습도 보였다. 한편 수비 면에서는 다시 레인지 팩터 1위를 기록했다.
2010년 개막전에는 9번 타자 겸 유격수로 출장하여 3회말 이와쿠마 히사시를 상대로 그 해 팀의 첫 타점이 되는 선제 적시타를 쳤고, 완봉승을 거둔 카네코 치히로와 함께 경기 후 히어로 인터뷰를 했다. 하지만 이후 타율이 저조하여 5월 3일에 2군으로 강등되었다. 교류전 기간에 1군으로 복귀했지만, 7월 2일 허리 통증으로 다시 등록 말소되었다. 8월 15일에 1군에 복귀했지만, 결국 프로 데뷔 후 가장 적은 85경기 출전에 그쳤고 타율도 .236으로 부진했다(단, 득점권 타율은 .302). 야마자키 히로시, 카네코 케이스케와 번갈아 기용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팀의 주전 유격수 부재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9월 4일 소프트뱅크전에서는 스기우치 토시야 공략의 발판이 된 적시타와 결승 적시타 등 3안타 2타점으로 활약했지만, 혹서로 인한 열사병 증세로 손발 경련을 일으켜 도중에 교체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4]

2011년에는 2번 타자 겸 유격수로 개막전에 출장했지만, 타격 부진으로 개막 5경기 만에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한동안 대타로 출전하다가 교류전 시작 전에 하위 타선에서 선발로 복귀했고, 8월 이후에는 2번 타자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이 해 처음으로 규정 타석에 도달했으며, 팀 내 최다인 42개의 희생타(리그 3위)와 52개의 사사구(리그 7위)를 기록했다. 타율은 .244로 낮았지만, 득점권 타율은 .292를 기록했다. 시즌 종료 후 오카다 아키후미 감독으로부터 다음 2012년 시즌의 2번 타자와 부주장으로 지명되었고, 가을 캠프에도 참가했다. 오프 시즌에는 키시다 마모루와 함께 선수회 부회장으로 취임했다.
2012년에도 전년과 마찬가지로 2번 타자 겸 유격수로 개막전에 출장했다. 개막 직후에는 높은 타율을 기록했지만 점차 타격감이 하락했다. 하지만 사카구치 토모타카나 고토 미쓰타카의 타격 부진으로 인해 5월 5일 닛폰햄전에서는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1번 타자로, 5월 19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는 처음으로 3번 타자로 출전하기도 했다. 8월 들어 더욱 타격감이 떨어졌고, 8월 29일에는 허리 통증으로 등록 말소되었다. 시즌 후반에 1군에 복귀했지만, 결국 규정 타석에 14타석 부족하게 시즌을 마쳤다. 한편, 개인 최다인 6개의 홈런을 기록했고, 홈 구장인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는 이전 5년간 2홈런에 그쳤으나 이 해에만 4개의 홈런을 쳤다. 또한, 7월 27일 닛폰햄전에서는 개인 첫 우측 방향 홈런을, 7월 8일 롯데전과 10월 1일 라쿠텐전에서는 결승 홈런을 기록했다. 시즌 종료 후에는 은퇴한 스즈키 이쿠요의 뒤를 이어 선수 회장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2013년 1월 25일, 야기 토모야, 이토이 요시오와의 트레이드로 키사누키 히로시, 아카다 쇼고와 함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로 이적하게 되었다.[5] 등번호는 이토이가 사용하던 '''7'''번을 물려받았다. 닛폰햄 및 그 전신 구단에서 등번호 '''7'''번을 내야수 등록 선수가 사용한 것은 사이온지 아키오(1957년 ~ 1966년 재적) 이후 47년 만의 일이었다.
3. 2.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시절 (2013-2014)

2013년에는 전년까지 주전 유격수였던 카네코 마코토의 부상으로 인해 개막부터 유격수 자리를 차지했다. 5월 20일 삿포로 돔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는 스기우치 토시야를 상대로 이적 후 첫 홈런을 기록했다. 시즌 전반기에는 하위 타선에 배치되었으나 후반기에는 주로 2번 타자를 맡았고, 클린업 타순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9월에는 오른쪽 팔꿈치와 허리의 만성적인 부상이 악화되어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었지만, 개인 통산 두 번째로 규정 타석을 채웠고 팀 내 최다인 32개의 희생타를 기록했다. 규정 타석을 채운 시즌에 100안타 이상을 기록한 것은 프로 입단 후 처음이었으며, 출루율과 도루에서는 개인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2014년에는 이적 2년차 선수로서는 이례적으로 팀의 주장을 맡았다[6]. 시즌에서는 개인 최다인 132경기에 출전했지만, 전년도와는 달리 타격 부진에 시달렸다. 시즌 종료 후 국내 FA를 선언했다[7]. 친정팀인 오릭스 버팔로스[8]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9], 라쿠텐[10] 3개 구단이 영입 의사를 보이며 각각 협상을 진행했으나, 11월 25일에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계약 체결 합의가 발표되었다[11]. 계약 기간은 3년이었다[12].
3. 3.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절 (2015-2019)
2015년에는 개막전부터 주전으로 기용되었으나, 5월 4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전 이후 왼쪽 옆구리 통증으로 인해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13]. 6월 28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 1군으로 복귀했으며[14], 복귀 후에는 부진했던 타격감을 끌어올리며 중요한 순간마다 안타를 쳐내는 모습을 보였다. 시즌 최종 성적은 개인 통산 최저 출루율과 수비율을 기록했지만, 수비 지표인 UZR은 +3.2[15]를 기록하며 주전이 부족했던 유격수 자리를 메워 팀의 센트럴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9월 10일 DeNA전에서는 2회에 투수 이시다 겐타를 상대로 솔로 홈런을 기록하며, NPB 전 구단 상대 홈런을 달성했다. 이는 역대 30번째 기록이었으며, 달성 당시 통산 홈런 수는 32개로 역대 달성자 중 가장 적은 수치였다.2016년에는 허리 통증으로 인해 3월 31일에 등록이 말소되었으나, 4월 21일에 다시 1군에 등록되었다. 이 해에는 100경기에 출장하며 타격 성적도 전년 대비 개선된 모습을 보였고, 야쿠르트 이적 후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하기도 했다.
2017년에는 왼쪽 어깨 부상으로 인해 80경기 출장에 그쳤다.
2018년에는 스프링 캠프 도중 부상으로 이탈하여 개막을 2군에서 맞이했다. 5월 4일 히로시마전에서 9회 2사 상황에 대타로 출전하여 극적인 동점 솔로 홈런을 쳤는데, 이것이 시즌 첫 안타였다. 이후 팀은 사카구치 토모타카의 끝내기 안타로 승리했고, 오비키는 시즌 첫 히어로 인터뷰를 가졌다[16]. 시즌 동안 주전 유격수 자리는 니시우라 나오히로에게 넘겨주고 주로 3루수나 대타로 경기에 나섰다[17][18]. 잦은 부상으로 출장 경기는 47경기에 불과했지만, 적은 타수에도 불구하고 타율 .350, OPS .911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며 팀이 리그 2위를 차지하는 데 힘을 보탰다.
2019년에는 정규 시즌 개막부터 1군에 포함되었다. 팀이 리그 최악인 16연패에 빠져 있던 6월 2일 DeNA전(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는 선제 3점 2루타를 쳐 연패 탈출에 기여했다. 8월 23일 한신 타이거스전(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는 1군 공식전 통산 1000안타를 달성했다. 하지만 시즌 막바지인 9월 13일, 구단으로부터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 구단은 은퇴 경기와 은퇴식 개최를 제안했지만, 오비키는 다른 구단에서 현역 생활을 이어가기를 희망하여 이를 거절했다[19]. 결국 12월 2일 NPB로부터 자유 계약 선수로 공시되었다[19]. 전력 외 통보 이후 12구단 합동 트라이아웃에는 참가하지 않고 다른 구단의 영입 제안을 기다리는 한편, 일본 학생 야구 협회에 소속된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지도자 활동을 하기 위해 필요한 학생 야구 자격 회복 연수를 받았다. 그러나 다른 구단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지 못하자 같은 해 12월 말 현역 은퇴를 결정했다[20].
4. 은퇴 후
2020년 2월 7일, 일본 학생 야구 협회로부터 학생 야구 자격 회복 적성을 인정받았다.[21] 그러나 같은 달 12일, 특별 연수 코치 업무 때문에 자격을 잠시 상실했다가, 같은 해 8월 19일에 다시 회복했다.
2020년 2월 16일부터는 닛폰햄의 특별 연수 코치로서 MLB의 업무 제휴 구단인 텍사스 레인저스로 파견되었다.[22] 이는 본인이 닛폰햄 구단에 직접 신청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레인저스 산하 마이너 리그 구단을 지도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 확산의 영향으로 파견은 약 1개월 만에 조기 종료되었다.[23][24]
2021년 4월에는 일본체육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코칭학을 공부하는 동시에, 경식 야구부의 임시 코치로 활동하며 학생들을 지도했다.[25]
2025년 1월 1일자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내야 수비·주루 코치로 취임할 예정이다. 등번호는 80번이다.[26]
5. 선수로서의 특징
주 포지션은 유격수이다. 프로 통산 타율이 높지 않은 편이지만, 득점권 상황에서는 비교적 높은 타율을 기록하는 경향이 있다. 2010년에는 시즌 타율 2할 3푼 6리에 그쳤으나 득점권 타율은 3할 2리를 기록했고,[43] 2011년에도 시즌 타율 2할 4푼 4리에 득점권 타율 2할 9푼 2리를 기록했다.
작전 수행 능력이 뛰어나 희생타와 볼넷을 많이 얻어내는 선수이다. 2011년에는 처음으로 규정 타석을 채우면서 팀 내 최다인 42개의 희생타(리그 3위)와 52개의 볼넷(리그 7위)을 기록했다. 주로 2번 타자나 하위 타선에 배치되었으며, 2011년 8월 이후로는 2번 타자로 자리를 잡았다.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으로부터 다음 2012년 시즌의 2번 타자와 부주장으로 지명받기도 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1번이나 3번 타자로 기용되기도 했다.
홈런 타자는 아니지만, 2012년에는 개인 한 시즌 최다인 6개의 홈런을 기록했으며, 특히 홈 구장인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만 4개의 홈런을 치는 등 특정 시즌에는 장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요통으로 인해 여러 차례 1군에서 제외되는 등[43] 부상 경력이 있으며, 이 때문에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한 시즌도 있다(2010년, 2012년).
호세이 대학 시절 주장을 맡았고, 프로 입단 후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선수회 부회장(2012년)과 회장(2013년)을 역임하는 등 리더십을 갖춘 선수로 평가받는다.
6. 에피소드
호세이 대학에서 주장을 맡고 있을 때에는 ‘호세이 대학 사상 최고의 주장’, ‘학생 야구의 귀감’이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였다. 프로에 입문할 때의 계약금 8000만엔(추정치)을 거의 대부분 자신의 본가인 신사로 보냈고[40] 팬 서비스에 관해서도 적극적이다. 또, 인권 계발 운동에도 2007년부터 매년 참가하고 있다.
오릭스 시절에 1년 후배였던 오제 히로유키를 동생뻘처럼 귀여워했다. 오제의 급사 직후에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어째서 좀 더 힘이 되어주질 못했던가. 다만 나 자신이 무기력했던 것을 후회한다. 정말로 미안했다”며 가까이에 있으면서 동료를 구해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자책감에 사로잡힐 정도의 참담한 심경을 토로했다.[51] 오제의 사망 후 오프에는 시즌 종료에 대한 보고를 위해서 오제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52][53]
2012년 시즌 종료 후 도쿄 도 출신의 28세 전직 회사원과 결혼을 발표했다.[54]
타석에 등장할 때의 등장곡은 밴드 노아노와의 ‘두더지는 새가 된다’를 택했다(단, 2013년부터 래드윔프스의 ‘너와 양과 파랑’으로 변경했다[55]). 또한 그 인연으로 2011년에는 노아노와가 스타디움에 와서 자신의 곡을 불러줬다.
오바 쇼타로부터 오릭스 시절을 포함한 2009, 2011, 2013년의 3회, 머리 및 상반신에 몸에 맞는 볼을 받았다. 2009년과 2011년에는 양쪽 모두 번트 자세를 취하고 있던 오비키의 안면에 오바의 던진 공이 직격한 적도 있어(두 차례 모두 오바는 위협구로 간주돼 퇴장을 당했다) 2013년에는 오비키의 왼쪽 팔꿈치 부분에 직구로 직격당했다. 2013년 몸에 맞는 볼을 받았을 때 오비키가 격분해 이를 저지하려고 한 포수 야마자키 가쓰키와 서로 몸싸움을 일으키기도 했다.[56][57]
7. 상세 정보
오사카부 오사카시 스미요시구 출신으로, 2000년 역사의 가미스무치 신사 구우지의 차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신사 일을 도왔다.[40] 오사카 시립 나가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연식 야구팀 ‘오사카 골든 파이어’에서 야구를 시작해 투수 겸 유격수를 맡았다. 중학교 때는 경식 야구팀 스미요시 야마토가와 시니어 소속 유격수로 전국 대회에 출전했다.
나니와 고등학교에서는 1학년 가을부터 주전 유격수가 되었고, 2학년 봄에는 제73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하여 팀의 8강 진출에 기여했다. 3학년 여름 오사카 대회에서는 5개의 홈런을 기록했으며, 고교 통산 15홈런을 쳤다.
호세이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1학년 봄 도쿄 6대학 야구 리그 개막전부터 9번 3루수로 출전하며 주전으로 활약했다. 3학년 가을에는 팀의 5년 만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4학년 때는 주장을 맡아 춘계 리그에서 2시즌 연속 우승을 이끌었다. 주장으로서 뛰어난 리더십을 보여 타 대학으로부터도 ‘호세이 대학 사상 최고의 주장’, ‘학생 야구의 귀감’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41] 대학 시절 수위 타자 2회, 최다 타점 1회, 최다 도루 1회를 기록했고, 베스트 나인에 5차례 선정되었다. 또한 고바야카와 다케히코의 팀 최다 안타 기록(114개)을 넘어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다카하시 요시노부를 제치고 리그 역대 4위인 통산 121안타를 기록했다. 리그 통산 성적은 98경기 출전, 타율 .331, 5홈런, 62타점이다.
2006년 11월 4일, 메이지 진구 외원 창건 80년 기념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도쿄 6대학 선발팀의 경기에서 선두 타자 홈런 포함 3안타를 기록했다. 같은 해 11월 21일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오릭스 버펄로스에 3순위로 지명되어 입단했으며, 등번호는 '''10'''번을 받았다.
2007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개막전에 9번 유격수로 선발 출전하여 3회말 이와쿠마 히사시를 상대로 팀의 시즌 첫 타점인 선제 적시타를 쳤고, 완봉승을 거둔 가네코 지히로와 함께 히어로 인터뷰를 했다. 그러나 이후 타격 부진으로 5월 3일 2군으로 내려갔다. 교류전 기간 중 1군에 복귀했으나 7월 2일 요통으로 다시 등록 말소되었다. 8월 15일 복귀했지만, 프로 데뷔 후 가장 적은 85경기에 출전해 타율 .236에 그쳤다. 야마사키 고지, 가네코 게이스케와 병용되며 주전 유격수 자리를 확고히 하지 못했다. 9월 4일 소프트뱅크전에서는 스기우치 도시야를 상대로 결승타 포함 3안타 2타점을 기록했으나, 경기 중 열사병 증세로 교체되기도 했다.[43]
2011년에는 처음으로 규정 타석을 채웠고, 팀 내 최다인 42개의 희생타(리그 3위)와 52개의 볼넷(리그 7위)을 기록했다. 타율은 .244였으나 득점권 타율은 .292였다. 시즌 후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으로부터 다음 시즌 2번 타자와 부주장으로 지명되었고, 기시다 마모루와 함께 선수회 부회장으로 취임했다.
2012년에는 개막전에 2번 유격수로 출전했고, 시즌 중 1번과 3번 타자로도 기용되었다. 개인 최다인 6홈런을 기록했으나, 8월 29일 요통으로 1군에서 제외되어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했다. 시즌 후 은퇴한 스즈키 후미히로의 뒤를 이어 선수회장으로 취임했다.
2013년 1월 25일, 야기 도모야, 이토이 요시오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기사누키 히로시, 아카다 쇼고와 함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로 이적했다.[44] 등번호는 이토이가 사용하던 '''7'''번을 물려받았다. 닛폰햄 및 전신 구단에서 등번호 7번을 내야수가 단 것은 사이온지 아키오(1957년~1966년) 이후 47년 만이었다.
닛폰햄 이적 첫해인 2013년부터 주장을 맡아[45] 개인 최다인 132경기에 출전했다. 2014년 시즌 종료 후 출전 기회를 요구하며 구단과 협상했으나 결렬되었고, 국내 FA 자격을 취득했다.[46] 친정팀 오릭스,[47]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48]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49] 등 3개 구단과 협상 끝에 11월 25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계약했다.[50]
- 대학 시절 주장으로서 리더십을 인정받아 ‘호세이 대학 사상 최고의 주장’, ‘학생 야구의 귀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프로 계약금 8000만엔(추정치)의 대부분을 본가인 신사에 보냈으며,[40] 팬 서비스에 적극적이고 2007년부터 매년 인권 계발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 오릭스 시절 1년 후배였던 오제 히로유키를 아꼈으며,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 후 자신의 블로그에 자책하는 글을 남겼다.[51] 시즌 종료 후 오제의 집을 방문해 추모하기도 했다.[52][53]
- 2012년 시즌 종료 후 도쿄 출신의 28세 전직 회사원과 결혼했다.[54]
- 타석 등장곡으로 노아노와의 ‘두더지는 새가 된다’를 사용했으나, 2013년부터 래드윔프스의 ‘너와 양과 파랑’으로 변경했다.[55] 2011년에는 노아노와가 경기장을 찾아 직접 곡을 불러주기도 했다.
- 오바 쇼타로부터 오릭스 시절 포함 2009년, 2011년, 2013년 세 차례 머리 또는 상반신에 맞는 공을 맞았다. 특히 2009년과 2011년에는 번트 자세 중 얼굴에 공을 맞아 오바가 퇴장당했고, 2013년에는 팔꿈치에 공을 맞은 후 격분하여 포수 야마자키 가쓰키와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56][57]
'''학력'''
- 나니와 고등학교
- 호세이 대학
'''경력'''
- 오릭스 버펄로스 (2007년 ~ 2012년)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2013년 ~ 2014년)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2015년 ~ 2019년)
7. 1. 개인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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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